한국 무기수입 세계 3위... 2계단 상승

한국 무기수입 세계 3위... 2계단 상승
SIPRI 발표, 대미종속성 67% -> 73%로 심화
2009년 04월 28일 (화) 12:10:00정명진 기자 mjjung@tongilnews.com
  
▲ 스톡홀롬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27일(현지시간) 발표한 '2008 군사무기 매매 자료' 중 주요 무기수입 5개국. [자료출처-스톡홀롬국제평화연구소]
한국이 지난 2004-2008년 기간 동안 군사무기 수입량이 세계 3위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발표된 2003-2007년 기간보다 2계단 상승한 것이다.

스웨덴의 군사문제 연구기관인 스톡홀롬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27일(현지시간) 발표한 '2008 군사무기 매매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2004-2008년 5년간 무기수입 총액이 전 세계 무기 수입액의 6%를 차지해 아랍에미리트와 함께 공동 3위로 집계됐다.

2003-2007년도 세계 무기 수입액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5%로 1년 만에 1%가 증가했다. 1999-2003년 조사자료에는 이 비율이 4%에 불과했는데 최근 들어 급증한 것이다.

또한 한국의 군사무기의 대미종속성도 더 강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 전체 무기수입액 중 1999-2003년 기간 동안 미국에 67%를 의존하고 있었으나, 2004-2008년에는 73%로 6% 늘어났다. 나머지는 독일에 12%, 프랑스에 9%를 의존하고 있다.

미국은 이 기간 동안 한국에 F-15K 전투기를 비롯한 전투기, 전함의 엔진과 주요 부품 등을 팔았다. 또 SIPRI는 2007년과 2008년에 한국이 주요 재래식 무기의 세계 최대 수입국이었다고 밝혔다.

이 기간 동안 세계 최대 무기 수입국은 중국으로 세계에서 11%를 차지했으며, 인도가 7%로 뒤를 이었다.
수출국으로는 미국이 31%로 단연 선두를 지켰으나 5년 전 35%보다 세계 점유율이 다소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2004-2008년 기간 동안 미국의 주요 무기 수출국 중 한국이 15%로 제일 큰 군사무기 수입국으로 집계됐다.

by 트로이카 | 2009/05/21 23:58 | 트랙백 | 덧글(0)

<종속이론과 세계체제론> - 제국주의의 간판을 바꿨네!

<종속이론과 세계체제론> - 제국주의의 간판을 바꿨네!

자본의 힘으로 주변부 ‘종속적 발전’ 추구… 누구를 위한 자본주의 이식인가


‘선진국’의 자본이 ‘후진국’에 투자되면, 후진국의 경제는 발전할까 아니면 반대로 후퇴할까? 이 질문은 지금처럼 ‘후진국’이 선진국의 자본을 찾아 투자를 호소하고 다니는 요즘 시대엔 완전히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들린다. 더구나 한국처럼 빚을 내서 사업하는 나라에서라면, 이런 의문을 갖고 있는 사람은 현실 경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선진국 투자의 이면에 감춰진 현실

하지만 이 질문에 진지하게 ‘인생을 걸었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 질문에 대한 부정적 대답이 진지하게 검토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하나의 국적을 갖고 있지도 않았고, 하나의 이론을 공유하지도 않았기에 하나의 학파를 형성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종속이론’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불릴 수 있었다. 이는 아마도 그들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이나 문제설정이 갖는 강력한 공통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앞서서 나가니, 살고 싶은 자여 따르라”라는 슬로건 아래, 이른바 ‘선진국’ 자신들의 발전 경로가 후진국이 따라야 할 모델이라고 주장하던 이른바 ‘발전이론’에 대한 비판, 후진국에 대한 선진국의 투자가 후진국의 경제를 발전시킬 것이라면서 착취를 위한 자신들의 활동을 무슨 자선사업이라도 되는 양 주장하던 경제이론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선진국이란 이름 뒤편에서 제국주의를 보고, 투자라는 개념 안쪽에서 착취를 보며, 그것을 통해 선진-후진을 잇는 단선적인 경제발전의 끈을 끊어버린다. 따라서 그것은 제국주의에 대한 부정적 비판일 뿐만 아니라 나름의 새로운 경로를 모색하자는 긍정적 제안이기도 했고, 제국주의 중심의 시야에 대비되는 제3세계적 시야의 독립선언이기도 했으며, 단일한 역사적 발전 개념에 대한 전복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것은 그 결과의 성공 여부를 떠나서 경제와 발전, 역사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수립했다는 점에서 20세기의 중요한 지적 유산 가운데 하나임이 분명하다.


(사진/종속적 발전은 사회적 불평등을 구조화한다. 귀금속을 고르는 부유층과 빈민가의 가족 모습은 브라질 경제의 양면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종속이론의 역사는 대략 세개의 문턱을 통과한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첫째 문턱은, 선진국 중심의 발전모델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한다. 가령 대표적인 발전이론가였던 로스토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여러분은 땅바닥을 기고 있지만, 이왕 기는 거 열심히 기라. 기는 데 익숙해지면 점차 속도가 붙을 거고, 속도가 빨라지면, 저기 비행기 보이지? 비행기가 이륙하듯이 여러분도 땅바닥에서 둥실 떠올라 이륙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 여러분은 우리 선진국의 대열에 함께 서서, 그동안 참고 참으며 부풀린 빵을 나누어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로스토의 ‘이륙이론’이라고 부른다. 물론 여기서 몇몇 솔직한 단어들을 경제학 용어들로 바꾸면, 생각처럼 자존심 상하는 얘기로 들리진 않을 것이다. 여기서는 발전된(developed) 나라와 발전중인(developing) 나라, 그리고 혹시 있다면 아직 발전하지 않은 나라만이 있을 뿐이다.

종속이론의 문제설정을 가장 명확하게, 그리고 가장 먼저 이론적으로 제시한 사람은 라틴아메리카 경제학자 앙드레 군더 프랑크였다. 그는 발전된-발전될 나라만이 있다는 생각을 반박하면서, 제3세계에 대한 선진국, 아니 제국주의 나라들의 투자는 발전을 가져온 게 아니라 반대로 ‘저발전의 발전’만을 가져왔을 뿐이라고 말한다. 저발전(underdevelopment)이란 아직 발전하지 않았지만 언젠가 발전할 어떤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발전하지 못하는 것이고, 발전과 반대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저발전의 발전이란 발전과는 반대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쉽게 말해 땅바닥을 아무리 빨리 긴들, 혹은 자동차를 타고 아무리 빨리 달린들 그게 비행기처럼 ‘뜰 수는’ 없다는 것이다.

프랑크의 문제제기 이후 발전의 환상과 반대되는 여러 가지 상이한 양상들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지적되었다. 가령 엠마뉴엘은, 선진국과 후진국간의 무역이란 부등가 교환이기 때문에, 무역과 거래가 늘면 늘수록 국제적인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 ‘발전된-발전할’의 단선적인 경로에 대한 프랑크의 비판은 이후 여러 사람들에 의해 ‘중심부’인 선진국과 상이한 발전경로를 갖는 ‘주변부’라는 개념으로 이어졌다. 더불어 주변부에서 자본주의 발전이 중심부에서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입증하려는 이론적이고 실증적인 노력들이 행해졌다. 가령 중심부와 달리 주변부 사회에서는 자본주의나 근대화가 몇몇 국지적인 영역이나 ‘잘 나가는’ 영역에서만 진행되고, 그것을 위해 빈민들이나 농민들처럼 근대화의 그늘에 가려진 영역을 착취하면서 진행되기 때문에, 계급적 분화도 자본가와 노동자계급으로 분해되는 과정을 겪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도시빈민과 같은 소부르주아층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변부 사회에서는 산업 노동자계급 못지 않게 도시빈민 등과 같은 ‘주변적’ 계급들이 변혁운동에서 더욱 중요한 위치에 선다고 한다. 여기서 보듯이 이제 중심부와 주변부라는 개념은 국제적인 차원은 물론, 주변부 사회 내부에서 경제적 파행성을 표시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주변부가 아무리 잘 나가도 한계는 분명

(사진/사미르 아민(이집트 경제학자(위)), 카르도수(현 브라질 대통령))

둘째 문턱은 ‘종속적 발전’이라는, 앞서의 맥락에서 보면 기묘한 개념으로 표시된다. 지금은 브라질에서 대통령을 하고 있는 카르도수가 이런 논리를 펴던 사람이다. 그것은 ‘저발전의 발전’이라는 말로 포괄하기 힘든 사례 때문에 생겨났다. 즉 브라질이나 한국, 대만, 싱가포르처럼 당시 ‘용났다’ 소리 들으면서 잘 나가던 나라들의 경제적 발전은 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나라들은 모두 자본과 시장에서 대외의존적인 경제구조를 갖고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종속이나 주변부라는 상황이 모든 경제발전을 원천봉쇄하며 오직 저발전만을 발전시킨다는 주장과 달리, 종속적인 상황에서도 일정한 발전이 가능한 게 아닌가? 반면 ‘한번 주변이면 영원히 주변’이라면 거기서 빠져나갈 전략도 꿈꿀 수 없다는 말인가?

이러한 반론을 통해서 ‘종속적 발전’이라는 개념이 나타나고, 그런 나라를 중심부나 주변부와 구별하기 위해 ‘반주변부’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이제 종속이론은 새로운 논쟁 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제국주의가 식민지에 끼치는 경제적 영향에 대한 논쟁으로까지 거슬러올라가면서, 좌파 이론의 중요한 논제를 형성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제국주의와 자본수출의 효과에 관한 것이다. 일찍이 레닌은 제국주의의 특징으로 ‘자본수출’을 들면서, 이전의 자본주의와 달리 제국주의는 상품수출이 아니라 자본수출로 식민지를 착취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자본수출은 자본관계의 수출이다. 수출된 자본은 공장을 만들고 노동자들을 고용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당연히 식민지에 자본주의를 이식하고 ‘발전’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착취를 위한 것이기에, 당연히 식민지에서 생산된 잉여가치를 제국주의 본국으로 이전시킨다. 여기서 앞의 입론을 강조하는 논리는 제국주의나 중심부 자본주의가 식민지 내지 주변부의 자본주의를 발전시킨다고 하는 주장으로 이어진다면, 후자를 강조하는 논리는 저발전과 종속을 강조하는 관점으로 이어진다.

사실 이러한 논란과 난점은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 혹은 발전과 종속 사이에 ‘반주변부’나 ‘종속적 발전’과 같은 어떤 ‘중간’을 끼워넣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문제는 그런 양적인 차이가 아니라 발전법칙의 차이라는 질적이고 근본적인 차이가 대립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변부에서 나타나는 발전의 불균등함을 개념화하기 위해, 가령 사미르 아민 같은 사람은 자본의 축적이란 세계적 규모에서 진행된다고 보고, 그러한 불균등함이란 특정 지역과 연관된 축적 전략의 차이로 설명하기도 한다. 여하튼 이로써 드러난 것은 발전이란 개념과 마찬가지로 ‘종속’이라는 개념 역시 종속적인 나라들 사이에 결코 단일하거나 단순하지 않다는 점이 새로이 부각되었다.

셋째 문턱은 종속이론과 세계체제론이 연결되는 곳에 있다. 사실 종속이론은 명시적으로 개념화하지는 않았지만, 중심부 나라와 주변부 나라의 관계를 전제로 시작하기 때문에, 이론 자체가 국제적인 스케일로 펼쳐진다. 그렇지만 주된 관심은 주변부 자본주의의 특수성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런 스케일에서 중심부 자본주의를 보면 어떨까? 중심부 자본주의의 발전, 혹은 제국주의의 발전이란 식민지나 주변부에 대한 착취를 통해서 가능해진 것이 아닌가? 요컨대 이른바 선진국의 ‘선진됨’(developed)이란 주변부의 착취, ‘후진됨’을 전제조건으로 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것이다.

사실 이런 관점에서 자본주의란 본래 일국적인 게 아니라 세계체제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70년대에도 있었다.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을 쓴 페르낭 브로델과 <세계체제론>을 쓴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그렇다. 그래서 이들의 이론은 흔히 ‘세계체제론’이라고 불리는데, 이 지점에서 종속이론의 문제설정과 연결되게 되고, 그럼으로써 종속이론은 자본주의에 대한 거대한 이론과 더불어 새로운 ‘일반성’을 얻게 된다.


자본주의적으로 착취하기 위한 시스템들

이러한 반복적인 일련의 논쟁과 이론에서 부닥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좀더 근본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즉 ‘주변부를 착취한다는 것’과 ‘주변부를 발전시킨다는 것’이 대체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논쟁은 언제나 그 중 어느 하나를 지지하고 선택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만약 <세계체제론>에서 주장하듯이 중심부의 발전과 ‘진보’가 주변부의 착취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면, 반대로 주변부에서의 착취는 주변부의 ‘발전’을, 다시 말해 주변부의 자본주의화 내지 근대화를 전제로 하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식민지 노동력을 자본주의적으로 착취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노동, 자본주의적 규율, 자본주의적 사고, 자본주의적 생활을 만들어내야 했다는 것이다. 가령 일본 총독부가 학교를 세우고, 애들을 학교 보내라고 종용하고 다닌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러한 근대화 내지 자본주의 발전을, 역사 발전이요 역사적 진보며, 따라서 ‘좋은 것’이라고 간주하는 평가방식은 아닐까?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도 자본주의가 왜 좋은지 잘 모르는 나 같은 사람에겐 문제가 차라리 쉬워 보이는 것일까?

이진경/ 성공회대 강사

trans@thrunet.com


한겨레21 2000년 04월 13일 제303호 

by 트로이카 | 2009/04/21 20:20 | 사회학적상상력 | 트랙백 | 덧글(0)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한독협 10년, 오늘의 독립영화 - ①]'한국독립영화의 아버지' 김동원 감독
컬쳐뉴스 2008-10-28 오전 11:35:02        
[이메일보내기 김나라, 안효원 기자
10월 23일 푸른영상 사무실에서 김동원 감독을 만났다.
▲ 10월 23일 푸른영상 사무실에서 김동원 감독을 만났다.

한국독립영화협회(한독협)가 10주년을 맞았다. 한때 생소하기만 했던 ‘독립영화’라는 존재의 정체성 확립과 자리매김의 역사는 한독협의 10년 역사와 나란히 놓여져 있다. 영화인들이 자본과 검열로부터 ‘독립’해 진정한 의미의 ‘표현의 자유’를 누리기까지 한독협은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줬다. 컬처뉴스는 한독협 탄생 10년을 맞아 독립영화계의 10년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시대 한독협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해 보고자 감독, 배우, 활동가, 제작자 등 독립영화인들 10명의 인터뷰를 기획했다. 이번 기획은 한독협 사무국과 팀블로그 필름온이 함께해 이루어졌다.

첫번째 인터뷰 대상자는 '한국독립영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송환>의 김동원 감독이다. 여러모로 한국 독립영화계의 상징적인 인물인 김동원 감독은 한독협의 초기 모습과 현재의 지점을 역사적인 맥락에 위치시켜 새롭게 보게해 준다. 그가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에 입문하고 활동하게 된 계기들 역시 놓치기 아까운 역사의 기록이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 바란다. / 편집자.

독립영화, 무에서 유를 만들다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소감 한 마디 해 달라.

김동원 감독: ‘벌써 10년인가’하는 생각이 든다. 내 나이 또래는 세월이 빨리 가니까.(웃음) 한편으론 독립영화 활동한지 오래됐는데 10년밖에 안됐나 싶기도 하고. 내가 초대 이사장을 하면서 한독협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현재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조영각 사무국장하고 어린 사무원은 그 때 월급 20만원씩 받고 시작했다.

독립영화계에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예상했던 것인가. 

이런 날이 올지 몰랐다. 지금은 미디어 센터, 독립영화전용관, 독립영화 제작지원제도 등이 생겼다. 이런 건 외국사례로 말로만 듣던 것들인데, 일반 영화계에서 질투할 만하다.(웃음) 막 없던 게 생기고 점점 늘어나니까, 있던 게 없어진 사람들은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독립영화계만 편애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근데 지원금 총액으로 보면 굉장히 작다. 

그만큼 독립영화계가 가시적인 변화를 일으켰다는 반증이 아닌가 한다.  

무엇보다 10년 전만해도 독립영화라는 말을 할 때 약간 켕기는 게 있었다. 그때 독립영화하면 반정부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당시 영화진흥공사(현 영진위)에 독립영화라는 말이나, 독립영화 지원은 없었다. 또 영진위 1기 위원회 생기고도 몇 년간은 없었고, 그 이후에 생겼다. 독립영화라는 단어를 공식화 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 강한섭 위원장이 다시 뺀다고 한다. ‘작은 영화’ 이런 식으로 바꾼다고.

작은 영화라... 김동원 감독이 다큐멘터리를 시작한 게 20년이 지났는데, 독립영화란 말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난 원래 상업영화 지망생이었고, 독립영화란 말도 없었다. 1980년대 얄라성이나 장산곶매 등에서 영화를 만들고, 미국식 개념의 이름을 붙여준 거다. 사실 미국식 개념과는 많이 다른데,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사실 나는 독립영화를 하려고 한 건 아니다. 상업영화 조감독을 했는데 이게 나랑 안 맞더라. 당시 전두환 정권 때 이런저런 일이 많았는데 방송에서는 누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때 내가 결혼식 비디오를 찍은 아르바이트를 했을 땐데, 사회의 모습을 찍어서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날라리, 가장 감동적인 올림픽을 만나다

원래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나. 김동원 감독의 젊은 시절이 궁금하다.

날라리였다. 데모도 안했고.(웃음) 1970년대에 학교를 다녔는데 당시엔 운동권이란 개념도 없었다. 언더그라운드에는 좀 있었는데 그때는 몰랐다. 난 연극 많이 하고, 놀기 좋아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 때 무의식적으로 뭔가 답답함을 느꼈다. 고등학교 때는 ‘왜 우리학교는 데모 안하지? 데모하면 휴교하는데’하면서 데모가 나길 원하기도 했다. 출처가 불분명한 유인물 만들어서 뿌리기도 했다. 휴교 때문에. 그런 걸 보면 약간 반골 기질이 있었나 보다. 그런 게 정리가 안 되다가 상계동 가서 정리가 됐다. 사회과학 책도 한두 권 읽어봤지만 전혀 안 와 닿았는데, 상계동 가서 구조적 모순이라는 걸 느끼게 됐다.

상계동에 어떻게 들어간 건가.

상계동 철거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내가 아는 신부님이 거기 들어가 계셨는데 강제철거 당하는 장면을 증거자료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하셨다. 하루만 와서 촬영해달라고 부탁을 하셨다. 그게 내 팔자를 바꿀 줄을 몰랐다.

처음 <상계동 올림픽>을 촬영할 때 ‘다큐멘터리는 이런 것이다’라는 생각이 있었나.

처음에는 관심도 없었고, 또 당시 우리나라에는 필름으로 만든 다큐멘터리도 거의 없었다. 대학 영화과에서도 단편영화제를 했지만 다큐멘터리는 없었다. 서울영화집단에서 8미리 필름으로 십 분짜리 다큐멘터리를 1985, 6년인가에 만든 게 전부였다. 그저 머릿속에는 TV에서 본, ‘추적 60분’유의 다큐멘터리만 있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그런 관성들을 떨쳐버리기 힘들었다. 그런데 외국 나가서 여러 다큐멘터리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보니까 ‘아 다큐멘터리가 할 만한 거구나’ 싶었다. 상계동 시절에는 전혀 몰랐는데, 가서 보니까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작품들이 있었다. 그 때 ‘다큐멘터리의 영역이 이렇게 넓구나’ 했다.

그 이후에 다큐멘터리의 매력을 느낀 건가? 어떤 매력을 느껴서 다큐멘터리를 계속하게 된 건가.

조연출을 한 4년 정도 했는데, 현장이 지겨웠다. 촬영할 때도 긴장감을 못 느꼈다. 그런데 상계동에서 철거 현장을 찍을 때, 특히 위험한 상황에서 철거 깡패들이 위협해도 전혀 무섭지가 않은 거다. 카메라가 알아서 막 돌아다니는 신들린 경험을 했는데, 그게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다. 촬영하는 게 이런 거구나. 또 철거, 투쟁 현장 모습들이 외부에 알려지기 힘든 상황에 <상계동 올림픽>을 발표했는데, 엉성하게 만들었지만 대학가에서 상영되고 그러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 때 다큐멘터리의 굉장한 힘을 느꼈다.

그래도 뭔가 손에 잡히지 않을 시절,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선택하기는 쉽지 않았을 거 같다.

<상계동 올림픽> 하면서 사회가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촬영할게 많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외국영화 직배 관련해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는데 정지영 감독이 나에게 ‘다큐멘터리를 해라. 극영화 하는 사람은 많지 않냐. 넌 잘할 것 같고, 너라도 해야 한다’라고 하더라.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닌 것 같고, 싫지도 않고, 또 극영화가 잘 안 풀리고 해서 다큐멘터리의 길을 걷게 됐다. 그렇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 길을 걷게 됐다.

총 제작기간만 12년이 걸린 <송환>은 비전향 장기수를 다룬 다큐멘터리로, 2004년 선댄스영화제 '표현의 자유상'을 시상하기도 했다.

투사? 난 그런 사람 아니다

1990년대에 <송환> 촬영하랴, <명성 그 6일의 기억> 발표하랴 정신없었을 거 같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부터 장기수들이 출소하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경험한 사람이니까 저분들의 증언은 기록할 필요가 있다 생각해 촬영을 시작했다. 사실 그걸 어떻게 쓸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에 장기수들의 삶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어머니들이 함께 벌인 석방운동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몇 편 나왔다. 그 때까지만 해도 <송환>에 대한 생각도 없었고, 그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다. 사실 내가 오며가며 찍은 거지 찍어야겠다 해서 찍은 게 별로 없었다.(웃음)

 그럼 <송환>은 어떻게 나오게 된 건가.

1999년 초부터 송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그들의 송환을 돕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사회적으로 이슈화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남북정상회담하면서 송환이 급물살을 타면서 엄청 급해졌다. 그 다음 6월부터 9월까지는 정신없이 찍었다. 그 전에는 판판히 놀다가.(웃음)
 
1990년대 들어오면서 한국 다큐멘터리의 파이가 커졌다. 주로 어떤 사람들이 촬영했고 어떤 관심을 가졌나.

지금도 우리나라 다큐멘터리는 액티비즘, 즉 투쟁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1980년대에는 당연히 그래야한다고 생각했고. 서울영상집단, 노동자뉴스제작단(이하 노뉴단) 등의 집단은 일종의 운동으로 한 거다. 노뉴단은 노동운동, 서울영상집단이나 민족문제연구소, 민족영화연구소 등은 그 외 사회문제를 다뤘다. 한국의 다큐멘터리는 태생단계의 특수성 때문에 액티비즘이 강하다.

김동원 감독은 어느 편에 속했나.

난 아무데도 속해있지 않았다. 굳이 얘기하면 빈민운동 쪽인데, 빈민지역 청년들과 활동을 하면서도 작업은 혼자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내가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정체성은 없었다. 영화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는 현장의 기록이고, 일상이었다. 빈민운동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는 생각으로 했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느 순간에 찾았나.

나는 아직도 감독이라는 말을 안 좋아한다. 난 다큐멘터리에서 감독이 너무 앞서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무리 감독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해도 감독이라고 부르고, 또 ‘그럼 뭐라고 부르냐’고 하니까 이젠 그냥 ‘맘대로 부르라’고 한다.(웃음) 감독이라는 말이 옛날보다는 많이 거슬리지는 않는다. 옛날에는 엄정한 사실성, 객관성 이런 것들이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래야 하는 줄로 알았는데 요즘에는 다큐멘터리도 연출을 해도 괜찮다는 게 일반적이니까. 내가 아무리 연출을 안 하려고 해도 할 수밖에 없다.

작업을 하면서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경우도 많이 있었겠다.

글쎄, 잡혀갔던 거?(웃음) 푸른영상 하면서 몇 번 잡혀갔다. 1993부터 2년 터울로. 그 때만해도 영화법이 손질되기 전이고, 장기수들을 찍는다는 게 시찰 대상이었다. 안기부 직원한테 매일 안부전화를 받았으니. 그쪽에서 조작간첩 사건들과 엮으려고 했던 것 같은데 잘 안됐다. 1996년에는 심의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음란비디오 단속법을 걸고 넘어졌다. 참, 음란비디오라니. 그 외에도 청소년 보호법, 국가 보안법 등 다양하게 조사받았다. 다행이 변호사를 잘 만나서 기각시켰다. 

투쟁의 역사다.(웃음)

투쟁은 무슨.(웃음) 난 투쟁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냥 내가 그걸로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잘못한 것도 없으니 당당한 거다. 심의를 받으려면 10분에 얼마 돈을 내야 하는데 내가 골이 비었나.(웃음) 여하튼 몇 번 들어갔다 나오면서 이미지가 그렇게 됐는데, 내가 용감해서 싸운 건 아니다. 그냥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 때문에 그런 거 같다.

김동원 감독은 2004년 선댄스영화제 표현의 자유상(<송환>) 등 국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한국 다큐멘터리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이면의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면서 주변의 따가운 시선도 받을 거 같다.

글쎄. ‘왜 이렇게 구질구질한 얘기만 하냐’는 사람은 있지만 따갑지는 않다. 당연히 알려야 할 이야기고. 지금은 방송에서 그런 얘기를 많이 하지만, 그때만 해도 전혀 안했는데 당연히 나라도 해야지 그랬다.


한독협. 힘든 시작, 지금은 괜찮아 무엇이든!

한독협이 세워지기 전, 독립영화인들은 어디를 구심점으로 모였나.

1991년에 독립영화협의회라는 단체가 세워졌다. 내가 의장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거기는 구속이 너무 많았다. 그 때만 해도 운동한다는 기분으로 작업을 했고, 모여 봤자 운동하는 독립영화인들만 모이는 거 같고. 1990년대 중반 넘어가고, 독립영화계의 지평이 넓어지면서 다양한 독립영화인들과 함께 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립영화가 뭐냐’ 하는 정체성 논란도 있었고, 일련의 산통 끝에 한독협이 생겼다.

한독협이 생기고 어려움은 없었나.

내가 기억력이 안 좋아서.(웃음) 앞서 얘기한대로 한독협의 정체성 찾기가 가장 힘들었다. 한독협 초기에 독립영화협의회나 민예총 영화분과 등과 관계 설정하는 게 어려웠다. 1996년부터 한독협 설립 논의를 시작했으니까. 독립영화 하는 사람들이 협회를 만든다는 거에 의구심 어린 시선도 있었고. 하여튼 초기에 발동 거는 게 좀 어려웠는데 발동 걸고 나서는 최근까지는 잘 굴러왔다고 생각한다.

영진위 3기 위원이었다. 어떻게 하게 됐나.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가면 회의만 많고, 그렇다고 독립영화에 관한 회의만 하는 것도 아니고. 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는데 가서 목소리를 내야 하니까, 가야 된다고 하니까 갔다. 별 재미는 없었다.(웃음)

어떤 목소리를 내고 싶었나.

목표가 너무 분명했다. 독립영화전용관 만드는 거. 10년 동안 만들자는 말만 있었지, 만들지 못했다. 더 이상 늦출 수 없었다. 난 다른 건 못해도 전용관 하나 만큼은 만들겠다는 각오로 들어갔다. 다른 영진위 위원들이 너무 적나라하게 의도를 내비치는 거 아니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런 독립영화인들의 노력 끝에 인디스페이스가 생겼다. 근데 인디스페이스가 위치한 중앙시네마 재건축 때문에 몇 년 안에 장소를 옮겨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럼 다른 곳을 찾아봐야겠지. 3기 영진위 때 미디어센터, 시네마테크, 독립영화전용관을 다 포괄하는 500억 규모의 복합상영관을 짓기로 서울시와 결정했다. 그런데 강한섭 위원장이 무슨 아시아센터를 건립한다고 한다. 지금 어떻게 진행 중인지 모르겠다.

규모를 500억에서 1,000억으로 늘린다고 들었다. 그런데 규모가 커지고, 새로운 사업계획을 만들면 그 만큼 그 과정이 늦춰지는 거 아닌가. 현재 미디어센터 미디액트나 서울아트시네마, 독립영화전용관 모두 공간 확보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아무래도 그런 측면이 있다. 음, 어떻게 보면 위기를 겪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어려움을 겪어보면 전화위복의 기회를 맞을 수 있다. 이건 좋은 극장이 생긴다는 측면이 아니라 독립영화인들에게 뭔가 좋은 공부가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하는 말이다.


다른 얼굴, 하지만 우린 가족이다

한독협 홈페이지를 보면 초기에는 게시판에 서로 안부도 묻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영화도 보고, 얘기도 하고, 술도 먹으면서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한독협 10주년을 맞이한 2008년. 지금 가장 큰 고민이 무엇인가.

글쎄. 내가 고민한다고 되나?(웃음) 이제 독립영화가 나름대로 사회적인 위상을 이제 갖게 됐다. 그런데 대안영화로서의 자기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영화가 잘 안 나오고 있다. ‘지금쯤 나올 때가 됐는데’하는 기대가 있는데 잘 그게 쉽지 않다. 예를 들어서 <은하해방전선>등 몇몇 작품은 기대를 많이 했고, 영화도 좋았음에도 불구라고 잘 안됐다. 영화는 관객과 함께 완성된다. 과연 이걸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보게 할 수 있을까. 영화가 안 좋은 게 아닌데, 왜 안볼까. 이런 고민들을 한다. 답 없는 고민.

최근에 등장하는 후배들의 작품들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나.

다큐멘터리만 보자면,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본 <워낭소리>란 작품은 놀라울 정도로 좋았다. 나와 스타일은 다르지만 반가운 작품이다. <우린 액션배우다> <우리학교> 등 1년에 한 편씩은 문제작들이 나온다. 한편으론 기쁘고, 한편으로는 ‘아 이런 게 일 년에 열편은 나와야 하는데’하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인 코드가 약해지고 있지만 그게 그렇게 아쉽지는 않다. 오히려 열심히 만들고, 진정성이 보이는 다큐멘터리가 1년에 3-4편만 나오면 좋겠다. 인디다큐페스티벌에 70여 편의 작품이 응모됐다고 한다. 아르헨티나만 해도 다큐멘터리 영화제 하면 700여 편이 응모된다고 하는데, 우린 고작 70여 편이다.

요즘 진행하고 있는 작업이 있나.

촛불 문화제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하고 있다. 올해는 촛불이 가장 활활 타지 않았나. 찍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간 건 아닌데, 나가다 보니 찍을 게 보이더라. 뭐 큰 건 아니지만 해야 할 거 같은 마음이 들어서 촛불 문화제에 대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독협의 또 다른 10년을 위한 제언을 해 달라.

제언이라. 아쉬운 건 한독협 홈페이지를 보면 초기에는 게시판에 서로 안부도 묻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물론 욕도 하고.(웃음) 뭔가 공동체적인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커져서 그런지 그렇지 못하다. 사실 이건 사업을 하는 게 아니다. 사업도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하는데. 독립영화 하는 사람들끼리 식구라는 생각을 하면 좋겠다. 도움도 주고받고, 영화도 봐주고. 이런 커뮤니티가 활성화 되어야 하는데 그런 계기를 못 만들어 주는 거 같다. 여러 영화제가 그런 역할을 했는데 요즘엔 형식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영화도 보고, 얘기도 하고, 술도 먹으면서 다시 식구가 됐으면 좋겠다.

 

by 달팽이 | 2009/04/17 01:24 | 기억 | 트랙백 | 덧글(0)

삶의 진실을 기록하는 카메라


 

 

 

 


 

김동원 감독의 부모님은 두 분 모두 평안북도 강계 출신이었다. 해방 전 좌익 운동에 잠시 참여했던 아버지는 월남 후 우익이었던 형의 일을 도왔다. 김일성대학에 다녔던 어머니는 월남 후 수도여자의대(고려대 의대의 전신)을 다녔고 의사가 되었다. 김동원 감독이 태어날 즈음, 어머니는 개인 산부인과를 운영하고 계셨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던 김동원 감독의 취향은 다분히 대중문화적이었다. 유년기의 가장 큰 놀이는 텔레비전 보는 것이었고, 중학생 시절엔 사진 찍기에 몰두했으며, 고등학생 시절엔 음악에 심취해 그룹 사운드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홍콩 액션과 스파게티 웨스턴을 즐겼고, 나탈리 우드 사진을 지갑에 꼽고 다니기도 했다. 재수 시절엔 매일같이 술을 마셨고 내기 당구를 쳤다. “개념 없던 시절이었죠, 하하하.” 그러던 어느 날. 입시가 한 달 정도 남았을 때였다. “그때 당구가 400이었어요.(웃음) 밤 11시쯤 됐나? 당구 쳐서 돈도 잃고 찬바람도 부는데, 갑자기 내가 정말 구제불능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한 달 동안 미친 듯이 공부했죠.”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갔지만, 대학 시절의 중심은 연극반이었다. “대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세상 모르고 살았죠. 그러다 예쁜 여학생들 많다고 해서 연극반에 갔어요.(웃음)” 그가 대학에 들어갔던 1970년대 중반은 숨막히던 유신 정권 시절. 무대는 그에게 일종의 해방구였다. “그때 연극을 하면서, 인생에서 처음으로 물음표가 생겼던 것 같아요. 선배들과 어울리면서 약간의 의식 변화도 있었고, 무대에 서서 뭔가를 표현할 때 답답한 것이 풀리는 쾌감도 있었고요. 청춘의 객기 같은 것 있잖아요. 막연하지만 세상이 뒤집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반항심 같은 것. 학습되진 않았지만, 그런 부분이 조금씩 커졌던 시기죠.” 당시 들었던 밥 딜런이나 도어스의 음악도 그에겐 큰 영향을 주었다. “영어 공부도 됐고(웃음) 미국에 대해서 생각하는 계기도 됐죠.” 그러면서 그는 “세상이 살 만한 곳이 아니”라는 부정적이고 삐딱한 시선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그래 봐야 냉소적인 수준이었죠.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악다구니처럼 노는 게 최고라는 일종의 쾌락주의? 그런 시기였죠.”

 

군 제대 후에 그는 극심한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충무로로 간다. “영화계의 외양만 보고, 멋있다고 생각했죠. 화려한 동경에서 영화 일을 시작한 셈이에요.” 첫 현장은 이장호 감독의 <바보 선언>(84). 사전 검열에 의해 ‘전면 개정’ 통보를 받은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그해 연말까지 영화를 찍어야 했다. 영화사들이 제작 실적으로 외화 수입 쿼터를 할당 받았던 시절. 한국영화는 외화를 사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한국영화의 위상이 너무나 낮았고, 검열이 있었던 시절이었어요. 그래도 1980년대 중반 넘어가면서 자기 목소리를 내려 했던 젊은 감독들이 등장했고, 나도 뭔가 할 일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죠. 감독이 되지 못한다면 이론이나 비평 같은 걸로 할 일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죠.” 그 시절 열심히 시나리오를 써서 제작자에게 가져갔지만, 영화 공부 좀 더 하라는 반응들이었다.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재능이 없었던 건 확실해요.(웃음)”


3~4년 동안 충무로에서 일했지만 얻은 것은 좌절감이었다. 영화 대신 웨딩 비디오를 찍었던 답답했던 시절. 그는 우연히 카메라를 들고 상계동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의 인생은 바뀐다. “상계동은 저를 다시 태어나게 한 곳이죠.” 1986년 10월이었다.


“9월에 1분도 안 되는 성화 봉송을 위해, 1월부터 40세대 200여 명이 떨어야 한다.” <상계동 올림픽>에 등장하는 이 한 줄의 내레이션은, 그 당시 서울 빈민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88올림픽에 맞추어 성화가 지나가는 길 근처는 ‘환경 미화’를 해야 했고, ‘미관상’ 좋지 않았던 상계동 주민들의 터전은 그렇게 철거되었다. 김동원 감독은 알고 지내던 신부님으로부터 부탁을 받는다. 재판 자료로 쓰게, 가재도구 파손된 걸 증거 화면으로 촬영해달라는 것이었다. “전두환 정권 말기였죠. 사방에서 데모가 있었는데, 그게 뭘 의미하는지 잘 몰랐어요. ‘사회구조적 모순’이라는 걸 단어로는 이해해도, 피부로 와 닿진 않았던 거죠. 그런데 상계동에서, 아기 업은 아줌마가 철거 용역들과 대치하고 몸을 날려 포크레인을 막으려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이런 곳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강하게 저를 친 거죠.”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상계동. 그는 모르고 살았던 ‘세상의 절반’을 알게 된다. 그는 그곳에 5년 동안 있었다. 그곳 주민이 되어 살았던 시간은 소중했다, “그곳의 하루하루가 큰 배움이었어요. 현실에 대한 배움도 있었지만, 사람에 대한 관심이 커졌던 것 같아요. 이전엔 몰랐던 달동네 사람들의 삶이, 매우 건강하고 재밌다는 사실에 괜히 신나기도 했고요.” 김동원 감독에게 상계동은, 영화에 대한 판타지를 깨줌과 동시에 내면의 복잡한 잡념을 없애준 곳이었다. 1988년에 나온 <상계동 올림픽>. 그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된다.

  

1991년 <상계동 올림픽>은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초청받았다. 이때 만난 일본 다큐멘터리의 전설적인 감독 오가와 신스케는 김동원 감독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다큐멘터리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지핀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푸른영상’을 만들었다. “다큐멘터리에 대한 자의식이 형성되던 시기였죠. 그래서 동아리 같은 개념으로 주변 사람들을 꼬셔서 푸른영상을 만들었어요. 자기가 가진 카메라와 편집기를 가져와서 서로 도움도 받고 스터디도 했죠. 이후 다큐를 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꾸준히 푸른영상을 찾았고요.” 터전을 마련한 김동원 감독은 <상계동 올림픽>의 연장선상에서 꾸준히 공동체에 대한 작업을 해나간다. <행당동 사람들>(94)와 <또 하나의 세상-행당동 사람들 2>(99)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상계동에서 오순도순 살아가는 공동체 정신을 알게 됐어요. 투쟁에 성공한 사람들이 함께 잘 사는 해피엔딩을 꿈꾸었고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죠. 투쟁도 성공하지 못했고, 공동체 내부에도 분열이 있었으니까요.”


이후 그는 여러 철거 지역을 다니게 됐고 행당동에서 어떤 이상적인 모습을 발견한다. “철거가 끝나도 공동체 생활을 이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행당동은 조금 달랐어요. 상계동에서 실패한 것을 행당동에서 해나간다는 것이 너무 반가웠죠. 다른 철거 지역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행당동 사람들>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명성, 그 6일의 기록>(97)은 1987년 시민 항쟁 기간에 대한 영화. 당시 김동원 감독은 삶의 터전을 잃은 상계동 주민들과 함께 명동성당으로 들어왔고, 자연스레 ‘6월 항쟁’을 그 중심에서 경험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카메라가 고장 나 당시를 전혀 기록하지 못했던 감독은, 10년의 시간이 지난 후 인터뷰와 자료 화면으로 당시를 회상하고 재구성한다.

 

<송환>(04)의 시작도 우연이었다. 가깝게 지내던 신부님이 비전향 장기수 두 분을 봉천동으로 모셔오는 걸 도와달라고 했고, 김동원 감독은 별 생각 없이 승합차에 카메라를 싣고 대전의 한 요양원으로 향했다. 그때가 1992년. 이후 12년 동안 기록한 800시간 분량의 테이프는 148분의 다큐멘터리가 되었고 선댄스영화제에서 ‘표현의 자유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송환>도 <상계동 올림픽>의 연장이라고 생각해요. 상계동에서 배운 것 때문에 봉천동 산동네에서 살고 있었고, 그러면서 할아버지들을 만나게 됐으니까. <송환>도 사실은 작품을 하려고 했다기보다는 비전향 장기수의 송환 운동을 촉진하고 돕기 위해 생각했던 거예요.” 이때 정부 차원에서 송환이 이루어졌고, 김동원 감독은 잠시 방향을 잃었다. 하지만 이것은 <송환>의 진정한 시작이 되었다. “당시 다큐의 여러 형식에 대한 감이 조금은 잡혔죠. 그래서 ‘내가 관련된 이야기’로서 비전향 장기수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나름 실험이었죠.” 그렇게 만들어진 <송환>은 한국 다큐멘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 되었고, 이후 극장용 장편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열었다. <송환>엔 “다큐가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이 사라진 세상”이라는 언급이 있다. 그럼에도, 어쩌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 수도 있지만, 김동원 감독은 다큐를 만든다. “난 그래도 다큐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요. 다큐멘터리는 어떤 주장이고, 그것엔 설득을 통해 변화를 바라는 의도가 있고, 결국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길 원하는 거니까.”

 

지난 20여 년 동안, 그의 ‘작업 환경’이 결코 좋았다고만은 할 수 없다. 경제적으로 힘들 때도 있었고, 정치적 이유로 네 번 정도 연행되기도 했다. “경제적 어려움이 얼마나 컸느냐고 묻는다면, 다른 사람들도 살면서 겪는 수준 정도? 연행 당했을 때도 무섭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그것도 상계동에서 배운 건데, 마주치기 전까지는 두려워도 실제로 맞닥뜨리면 그 두려움은 해소가 되거든요. 상계동에서 집을 헐리고 천막 생활을 했을 때, 천막도 빼앗아간다는 얘기가 돌았어요. 그래서 두려움으로 하루하루 살고 있는데 실제로 천막을 털렸죠. 그러니까 오히려 두려움이 없어졌어요. 비닐 덮고 자는 게 그렇게 따뜻한지 알게 되었고.(웃음)”


다큐를 만든다는 것은 ‘사람’에 대한 고민이다. 그것이 다큐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고 또 고통이기도 하다. “내가 다른 사람의 삶에 개입할 권리가 있는가, 내가 이 사람을 이용하는 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그렇다고 해서 개입을 포기하면, 다큐적 ‘재미’가 없어져요, 저는 어쩌면 운이 좋았죠. ‘사람’ 때문에 고통을 겪은 적은 별로 없었거든요. 아마 작품을 하려는 의도로 만났다면 부자연스러웠을 거예요. 주변의 잘 아는 사람을 찍다가 작품으로 이어졌기에, 그런 딜레마는 거의 없었던 셈이죠.” 하지만 ‘자연인 김동원’이 아닌 ‘다큐 감독 김동원’이기가 힘들 때도 있다 “송환 당일, 할아버지들이 떠나시는데, 마지막 이별을 해야 하는데, 나는 카메라를 들고 있어야 했죠. 카메라를 내팽개치고 싶었어요.” 어머니에 대한 다큐도 그런 이유로 접었다. 어머니를 통해 해방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그때의 기억을 환기하는 걸 원치 않으셨다. “어렵게 승낙을 받아서 한 번 촬영을 했는데, 너무 힘들어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프로젝트를 접었어요. 다큐는 대상의 의지에 의해 결정되는 거니까요. 그리고 내가 ‘다큐 감독 김동원’은 포기해도, 아들로서 ‘자연인 김동원’은 포기할 수 없는 거고요.”

최근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다큐를 가르치고 있는 그는 어떤 아이러니를 느낀다. “다큐를 가르친다는 게 뭔가 스스로에게 물어요. 정답은 아닌 것 같지만 ‘같이 뒹구는 것’ ‘같이 사는 것’이라고 자답하고요. 저도 다큐를 누구에게 배운 적이 없거든요.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현장에서, 역사 안에서 ‘현실’로서 배웠던 것 같아요.”

 


 

그는 여전히 다큐멘터리를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굳어진 그 무엇에 대한 저항이죠,. 비판적이지 않은 다큐는, 짠맛을 잃은 소금 같아요.” 그리고 김동원 감독에게 다큐멘터리는 궁극적으로 ‘삶’이다. “최소한 내 삶이죠. 다큐는 가치관을 이야기하는 것이니까. 그 가치관을 남에게 제시하는 것인데, 내가 그 가치관대로 살지 못하면서 다큐 작업을 하는 건 힘들어요. 다큐를 만든다는 건 내 삶에 대한 도전이고 확인이고 반성이죠. 작품의 힘이라는 건 결국은 감독의 삶에서 나오게 되어 있거든요.” 현재 <상계동 올림픽, 그후>를 만들고 있는 그는 다큐 작업이, 일과 삶과 놀이가 분리되지 않은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연히 다큐를 하게 됐지만, 지금은 굉장히 만족하고 있는 상태예요. 만약에 내가 극영화 감독이 되었다면, 지금도 할 수 있을까요? 다큐가 좋은 건 정년이 없다는 거죠.(웃음) 만약 상업영화 감독이 됐으면, 지금은 어디서 식당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요.(웃음).”


  

by 달팽이 | 2009/04/17 00:51 | 기억 | 트랙백 | 덧글(0)

가난한 카메라의 전투

가난한 카메라의 전투 - 다큐멘터리 감독 김동원

김규항이 만난 김동원 감독

아웃사이더

2001년 4월 10일

 

 

 

내가 ‘가난’과 ‘공동체’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된 건 상계동 철거민들을 만나면서부터이다. 난 상계동 철거현장에서 책으로만 봤던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폭력의 실체를 똑똑히 보았다.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포크레인을 앞세워 집을 부수는 빨간 모자를 쓴 철거 깡패들, 그 포크레인 밑으로 몸을 던져 철거를 막으려는 주민들, 겁에 질려 울고있는 아이들... 이런 장면들을 촬영하면서 단지 이사갈 수 없는 세입자란 이유만으로 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재개발은 올림픽과 도시미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재벌과 정부의 땅투기, 집투기라는 사실을 별다른 설명 없이도 깨달을 수 있었다. ‘구조나 계급이 문제다’, ‘적어도 남에게 피해는 안 끼치고 산다’같은 평소 내 지론은 그 상계동 철거현장에서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당시 난 동부이촌동의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곳 역시 20년 전 뚝방 동네 사람들이 살던 보금자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본의는 아니더라도 결국 나 역시 가해자에 편에 있었던 셈이며 그런 부끄러움이 철거민들을 평생이웃으로 선택하게 했다. 난 상계동 주민들과 함께 머물면서 카메라를 그들의 시선과 일치시키려고 노력했다, 겉으론 쾌적하게 보이는 아파트들, 순진한 중산층의 욕망 이면에 있는 자본과 권력의 음험한 결탁과 온갖 회유와 협박, 그리고 철거민들의 저항 혹은 굴복의 역사를 나의 카메라로 파헤치고 싶어했다. - ‘<또 하나의 세상> 연출 노트’에서

 

Q 대마초를 길러가며 피웠다는 믿기 어려운 얘기도 있고, 선생의 청년 시절 이력과 오늘 삶은 무척 대조적이다.

 

지금 내 삶은 대학을 졸업하도록 세상물정 모르고 놀았던 퇴폐적인 삶에 대한 당연한 벌이라는 생각도 한다. 80년 6월에 제대해보니 세상은 시끄러운데 나는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었다. 고통스러웠고 앞이 보이지 않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자살까지 생각했는데 그러면서 조금씩 정리되어 갔다. 나도 뚜렷한 인생관을 갖고 싶다,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천주교 쪽에서 빈민운동 하던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도와주었다. 세례를 받으며, 다시 태어났으니 못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Q 모든 탕자가 돌아오는 건 아니다. 달랐다는 생각은 안 드나.

 

원래 이렇게 되게 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의사 집안이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삐딱한 데가 있었고 언젠가 ‘이터널 마이너리티’라는 말을 듣고 생각을 많이 했다. 소수일 때 오히려 풍요로울 수 있고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있다는 생각. 특히 한대수 씨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 시절 내 또래는 대개 그랬지만 남과 달랐다면 그런 반항심이 맥을 끊지 않고 계속 남아 있었다는 거다. 구체적인 사회 현실에 대한 건 아니었어도 인간과 세상에 대한 삐딱한 시선은 언제나 품고 있었다.

 

Q 옛날 생각을 하기도 하나.

 

이따금 씩. 그러나 미련은 없다. 놀아볼 대로 놀아봤기 때문일 거고 그런 쾌락이 남기는 허무와 불쾌감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일 거다.

 

Q 실은 나도 선생처럼 좀 다른 이력이 있다. 얼마 전 어느 웹사이트에 건달 출신인 주제에 세상을 비판할 수 있느냐는 글이 올라 웃었다.

 

아, 그런가. 양면성이 있는 것 같다. 그런 방황의 어떤 부분을 분명히 반성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이너의 가치를 익히는 것일 수 있고 무난하게 생활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볼 수 있다는 생각도 한다.


Q 다큐멘터리 하기 전엔 충무로 생활을 했는데.

 

대학원 다니면서 조감독 생활을 했는데 학교나 사회 분위기와 영화 조감독 하는 나 사이의 심한 괴리를 느꼈다. 내가 너무 편하게 앞길을 정하고 간다는 죄의식이었다. 상계동에 들어가면서 많이 정리가 됐다. 어떻게 하면 영화를 잘 만들 수 있을까, 유학을 가야 하나 충무로에 남아야 하나 하는 고민들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건지 철거민들한테서 배웠다. 극영화를 그만 두고 다큐멘터리를 시작하면서 철거민이라든지 비전향 장기수라든지 노동자라든지 세상의 그늘에 처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Q 의사의 아들이 철거촌이라. 거부감은 없었나.

 

매료되었다. 내가 본 상계동 철거민들은 아주 용감하게 싸우고 싸움이 끝나면 어린아이들처럼 엉엉 울기도 하고 커다란 솥에다가 밥이나 라면을 끓여 빙 둘러앉아 먹고 술판 벌어지면 정말 노는 것처럼 놀고 그런 모습에 매료되었다. 내가 갖지 못한 게 그들에게 있었다. 동시에 내가 존중하던 사람들의 허위나 위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Q 민중에 대해 낭만적인 기대만 하다, 그들의 뒤틀린 외양에 기층 실망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상계동에서 한참 싸움이 절정일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습들을 봤다. 옷가지가 들어오면 같이 모여 나누어야 할텐데 몰래 먼저 좋은 걸 빼간다든지, 라면 들어온 걸 누가 하나 더 가져갔네 해서 싸움이 나고, 그런 다툼으로 회의가 개판이 되고 그랬다. 내가 잘못 판단했나 잘못 믿었나 하는 좌절감이 들었다. 그런 고민을 내가 소속한 천도빈(천주교 도시빈민사목회) 신부님들에게 털어놓으니 그러더라. 그런 모습들이 비굴하고 추악하게 보이겠지만 중산층이나 부자들은 사기를 친다거나 도둑질을 하는 것도 점잖은 방법으로 하기 때문에 안 드러날 뿐이다. 그런 면은 사람한텐 다 있는 거다. 차라리 솔직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Q 지식인들은 민중을 개념화하고 개념화한 민중에 실망한다.

 

똑같은 사람이라는 데서 출발하면 된다. 민중에 대한 낭만적 기대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민중에게 있다. 중요한 건 그런 모든 것들을 솜처럼 받아들이는 힘 또한 민중에게 있다는 거다. 어떤 분이 민중을 어머니의 모습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힘이고 우리를 지탱하는 힘이다.

 

Q 개신교 평균치에 비해 나은 편이긴 하지만 천주교 역시 보수적인 부분도 많다.

 

말하자면 천주교 좌파인 셈인데 성당에는 잘 안 나간다. 천도빈 모임이나 동네에서 미사 할 때는 꼭 참석하지만 큰 성당이나 이런 데 가면 적응이 안 된다.

 

Q 기독교든 천주교든 예수의 삶을 따르는 일인데.

 

무엇보다 가난해야 한다. 강요된 가난은 죄악이고 극복해야 하는 것이지만 자발적으로 선택한 가난은 바로 예수의 모습이다. 그것에 의심이 없다. 이젠 버리는 게 어렵지 않고 갖지 않는 게 편안하다는 걸 몸으로 알고 있다.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버틸 수 있다고 믿고 웬만한 건 걱정을 안 한다. 아이들 과외도 못 시키지만 과외를 시키는 게 비정상이고 설사 아이들이 대학을 못 가고 가난한 기층 민중으로 살더라도 전혀 걔들한테 불행한 게 아니라고 믿는다. 도시빈민이나 농민 노동자의 삶 속에는 지식인들이나 중산층들의 삶이 가질 수 없는 게 있다.

 

Q 선생에게 가난은 자기 절제인가.

 

편안한 거다. 그러나 무작정 편안한 게 아니라, 가난해야만 가난의 가치를 가질 때만 세상의 여러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고 나는 그걸 따라가는 거다. 가난은 이제 내 가치관이고 다른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다.


Q 부인은 선생을 지지하나.

 

아내도 빈민운동을 했고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일치한다. 많이 못 벌어가는 건 별 문제가 없는데 최저생계비를 못 지키기는 일이 잦아지면 심각하게 추궁을 받기도 한다. 요새는 좀 낫다. 특강 불려가고 대학 강의도 적지만 고정수입이 되고. 경제적인 문제보다는 아이들 문제가 쉽지 않다. 이를테면 텔레비전을 멀리해야 할 텐데 꼼꼼하게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잘 못한다.

 

Q 아이들은 아빠를 어떻게 생각하나.

 

직접 물어본 일은 없지만... 아내 말로는 자랑스러워 하는 것 같다고 한다. 제일 아쉬운 게 시간을 같이 못 보내는 것이다. 새벽에 작업하다 들어가서 애들이 학교간 다음에 일어나기도 하고. 어쩔 수 없지만 그런 모습이 아이들한테 안 좋게 보일 것 같아 고민이다. 아내나 아이들은 일찍 자고 5시에 일어나는데 나는 야행성이라 그 시간에 자니까 잘 안 맞는다. 집안 일이라도 분담하려고 노력을 한다.

 

Q <민들레>를 만들던 후배들이 한번은 그랬다. 유가협 어머니들과 오래 지내다 보니 갈등하는 모습이나 꺼려지는 모습도 있는데 작품에 그런 걸 담아야 할 지 빼야 할 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나는 보여줘도 충분한 올바름이 있지 않느냐고 했는데 어찌 됐든 <민들레>엔 그런 모습들이 담겼고 그래서 더한 감동이 있었다. 다큐멘터리 작업에서 그런 고민은 필연적일 텐데.

 

늘 부닥치는 고민이다. 균형을 잡는 게 중요하다. 80년대에는 국가 폭력이 어마어마했으니까 당시 철거민 내부의 갈등을 드러내는 일은 그야말로 객관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젠 그래야 하고 그럴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Q 최근작인 <또 하나의 세상>(행당동 사람들 2)은 너무 미화했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 작품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상계동 철거하면서 꿈꾸었던 공동체가 바로 행당동 공동체다. 협동운동을 하면서 자활을 도모하면서 한편으로는 가난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행당동이 이루어냈다. 물론 그런 모습이 다는 아니지만 나는 그 작품을 일종의 교육용이라 생각했다. 다른 철거민들에게 희망을 준다고 할까. 내가 그들의 삶의 모습을 그리려 했다면 그들의 갈등하는 모습이 담겨야겠지만 나는 그들의 사업을 그리려 했고 그 사업의 성공 가능성을 강조하려 했다.

 

Q 다큐멘터리에서 객관성은 존재하는가.

이를테면 10여년 전 텔레비전에서 광주를 다룬 <어머니의 노래>라는 작품을 했다. 당시 그 작품이 객관적이지 않고 지나치게 희생자들 편에만 서 있다는 방영 반대 논리가 있었다. 물론 그 작품을 낱개로 보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통시적 관점에서 보면 10여 년 동안 텔레비전은 가해자의 논리에 의해서만 광주를 묘사하지 않았나. 그런데 10년이 지나 처음으로 피해자의 시점이 강조된다 해서 객관성을 잃었다고 얘기할 순 없다는 거다. 내가 다루는 소재로 얘길 한다면 80년대에는 도시빈민 문제가 묻혀 있던 역사였다. 그것을 처음 드러낸 작품을 가지고 객관성을 논란하는 건 사치스런 일이지만 이젠 도시빈민운동의 역사도 생겼고 도시빈민의 편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작품도 몇 개 나와 있으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생각한다. 나만의 균형감각인 지 모르겠지만 한 작품을 가지고 객관성을 말하는 건 위험하다. 다른 작품과의 관계라든가 사회 전반의 맥락에서 작품을 봐야 한다.

Q 푸른영상 안에서 그런 입장 차이로 갈등을 빚는 일도 있나.

 

우리는 세상을 보는 입장 자체가 비슷한 편이라 큰 갈등은 없다. 이미 어느 정도는 걸러진 비슷한 사람들이 푸른영상에 들어오기 때문일 거다. 물론 관심 소재나 주제는 다들 다르고 사람을 전면에 세우느냐 주제를 전면에 세우느냐 하는 방법론도 다들 다르다. 제안한 사람, 먼저 얘기를 꺼낸 사람에게 기본적인 결정 권한을 주는 게 우리의 원칙이다.

Q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어떻게 보나.

 

텔레비전 덕에 다큐멘터리가 양적으로 늘어났다고들 하지만 실은 텔레비전이 다큐멘터리를 말아먹었다. 텔레비전 덕에 다큐멘터리의 모든 형식과 방법이 굳어버린다. 텔레비전에서 요구하는 형식이 있다. 친절해야 하고 뭔가 깔끔해야 하고 시청률 때문에 소재주의나 선정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항상 시간에 쫓기느라 최소한의 예술적 고민이 어렵다. 구조적으로 많은 걸 포기한 작품일 수밖에 없다. 방송사 밖에서 만들어지는 다큐라 해도 텔레비전이 거의 유일한 상업적 경로이기 때문에 텔레비전이 요구하는 걸 염두에 두고 작업하게 된다. 텔레비전 이전에도 다큐는 있었다. 우리는 텔레비전 다큐를 다큐의 전부처럼 생각하지만 그건 3, 4십 년밖에 안된 거다. 텔레비전 이전의 다큐들은 자유분방했고 예술적으로도 훌륭했다.

 

Q 계급적 편향도 문제인 것 같다.

 

텔레비전 다큐는 PD의 시각, 중산층의 시각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그런 해석들이 시청자들에게 그대로 전염된다. 다른 시각으로 말하고 다른 방법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텔레비전은 언제나 한가지 시각 한가지 방법밖에 없다.

 

Q 선생의 작품을 텔레비전에서 방영하겠다면.

 

당연히 받아들인다. 물론 우리로선 방영료를 받는 것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작품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한테 보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작품에 대한 간섭만 없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Q 90년대 초만 해도 독립 다큐 하는 사람들이 홈비디오 장비를 사용했던 걸로 안다. 6밀리 디지털이 나오면서 그런 장비의 문제가 해결된 셈인데.

 

6밀리 디지털은 크기도 작고 값이 싸면서도 프로급 성능을 가진 장비라 독립 다큐멘터리 작업엔 더할 나위 없이 효율적이다. 우리도 97년부터 대부분 6밀리로 작업한다.

 

Q 좀 달라지고 있지만, 영화 하는 사람들에겐 필름에 대한 환상 같은 게 있다. 필름 다큐멘타리를 할 생각은 없나.

 

전혀, 그럴 필요성을 못 느낀다. 필요하다면 키네코 장치로 비디오 작업을 필름으로 옮기면 된다. 필름카메라는 굉장히 거추장스럽기도 하고 무엇보다 연출을 할 수밖에 없다. 대상이 편안하지 않고 워낙 필름이 비싸기 때문에 인터뷰를 해도 연습을 하고 해야 하니 그걸 무슨 재미로 하겠나.

 

Q VJ라는 직업도 디지털 장비와 함께 본격화 했다. 자주적인 다큐 작가일 수도 있고 새로운 형태의 방송 아르바이트로 보이기도 한다.

 

외국의 경우에는 VJ들이 스스로 아이템을 잡아 촬영하고 나래이션 넣어 우리로 말하면 9시 뉴스 같은 데 팔고 한다. 우리 방송사는 그런 걸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걸 자기네들이 한다는 생각으로 방송사 안으로 흡수하려 하기 때문에 언제나 하청구조에 머물게 된다. VJ들의 문제라기보다는 구조적인 문제다.

Q 근래 한국영화의 형편이 많이 좋아졌다. 그러나 모든 가치 기준이 산업 차원으로 흐르는 건 한심해 보인다. 투기업자가 영화판에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는가 하면, 어떤 평론가는 할리우드에 비하면 한국영화는 다 독립영화라는 엉뚱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선생은 독립영화협회 대표이고 실제로 독립영화인들의 맏형 노릇을 하고 있는데.

 

2년 전 스크린쿼터 싸움할 때 독립영화 쪽도 참여했는데 한편에선 독립영화와 스크린쿼터가 무슨 상관이냐는 비판이 있었다. 당시 나는 오락영화나 영화적 환상도 필요하다, 영화문화의 다양성을 지켜야 한다는 차원에서 참여했다. 문제는 스크린쿼터를 내세우며 영화가 하나같이 블록버스터를 지향하고 그런 영화만이 살아남게 되는 구조가 되어간다는 거다. 이제 우리는 스크린쿼터 싸움에 참여하지 않는다. 우리가 요구할 것은 독립영화 전용관과 문화로서의 영화다. 한국영화 구조가 이젠 완전히 할리우드를 빼 닮아가고 있다. 산업적 외형에서 나아졌다지만 속으론 더 악화되었다. 옛날에는 그나마 잘 만든 영화와 못 만든 영화가 있었는데 지금은 재미있는 영화와 재미없는 영화만
있을 뿐이다.

Q 그런 흐름을 견제하기엔 독립영화 쪽의 힘이 부족해 보인다.

 

아직은 자생력이 없고 그런 실정이 모든 문제의 한 원인이다. 외국의 경우를 보면 환갑 넘은 사람들도 독립영화를 하는데 그런 전통과 역사가 생길 때 독립영화 쪽에서 영화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다.

 

Q 선생이 환갑을 넘기면 한국에도 환갑을 넘긴 독립예술가가 존재하게 된다.

 

나도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 대중 음악 쪽도 그렇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독립예술가 생활을 계속한다는 게 아직은 어려운 현실이다. 열심히 하던 사람들도 일정한 시기가 되면 제도권으로 편입되거나 아예 포기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독립예술 부분은 제도권 예술계의 예비 인력풀이나 아마추어 부분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독립영화는 결국 독립영화니까 어려운 건 어디나 마찬가지다. 다만 외국엔 기금 같은 게 많다. 영화를 찍겠다 하면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생활보조비가 나간다. 우리는 이제 그런 게 시작되고 있는데 좀 기형적이다. 현재 상태에서 직접 지원에 치중하는 건 독립영화의 정체성을 훼손할 수도 있다. 인프라를 구축하는 게 급선무고 미디어센터를 만들어 카메라나 편집장비들을 좀더 쉽게 활용하고 전용관에서 작품을 상영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무조건 돈으로만 풀려 하는 건 박정희 시절부터 길러진 습성이라 바꾸기가 어려운 것 같다.

 

Q 돈 문제는 좀더 심각한 부분 아닌가.

 

돈, 물론 좋다. 우리도 운영비가 맨 날 모자라 사전제작 지원금을 받아볼까 생각도 하는데 돈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밥값 없으면 찍는 사람한테 얻어먹고 테이프 없으면 쓴 테이프 또 쓰면 된다. 다른 곳과 비교하면 서울영상집단은 좀 길게 잡고 큰 작품을 하고 노동자뉴스제작단은 반대로 현장성과 속보성을 중요시 하는데 우리는 그 중간 쯤이다. 원맨 시스템으로 제작비를 최소화 하되 대신 시간을 많이 들어가는 시스템이다. 카메라와 편집장비가 있으니 테이프 값이나 진행비 정도 1,2백 만원으로 작품을 할 수 있다. 돈 없어서 제작 못하는 건 아니다.

 

Q 결혼식 비디오는 요즘도 하는가.

 

나는 이제 졸업했지만 여전히 많이 한다. 수익사업은 30만원 이하는 개인 아르바이트로, 30만원 이상은 푸른영상의 사업으로 하고 있다.

 

Q 30만원이 넘는 종목은 뭔가.

 

요즘 시민단체에 돈이 도니까 가장 많은 게 교육비디오 제작이다. 기업 홍보물도 내용이 건전하면 만들어준다. 중국 투자 중계하는 회사, 쓰레기를 분해해서 거름을 만드는 회사, 영어교재도 했고...

 

Q 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닌데 문제는 없나.

 

사실 수익사업이라면 포르노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작품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한다. 물론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기는 하지만 이걸 해야 하냐 말아야 하냐 고민에 시간을 뺏기는 건 더 어리석은 일이다. 한나라당 의원 홍보물을 해야 하냐 말아야 하냐 내부 논쟁이 있는데 나는 할 수 있다 생각한다.

 

Q 활동비는 얼마나 지급되나.

 

30만원이 기본이고 결혼을 하면 10만원 붙고 아이가 생기면 또 10만원 붙고 아이가 둘이면 또 10만원 붙는 시스템이다. 처녀 총각들은 30만원을 받는 거고 나는 아이가 셋이니까 70을 받아야 하는데 대개 50% 미만으로 받는다. 이번 달에도 고민스러운데 지난 달에 50% 받았고 지지난 달에는 30% 받았다. 100% 받는 건 수익사업의 잔금을 받았다든지 그럴 때인데 1년에 한두번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10%든 20%든 반드시 활동비를 지급한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Q <엄마의 사랑은 끝이 없어라>라는 단편영화는 내용이 파격적이었는데 어디선가 선생이 칭찬한 걸 봤다. 선생 취향은 아닐텐데 그런 노력이 주는 나름의 유익을 평가하는 건가.

 

아니, 그 자체의 상상력이 신선하지 않은가. 무조건적인 사랑인 모성애를 포르노에 빠진 아들과 비교한다는 건 상당히 신선한 발상이다. 결국은 모성애의 승리로 끝난다는 것이 아이러니컬하기도 하고. 우리한텐 80년대의 경직된 관성들이 남아 있다. 80년대의 관성이 없어진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운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새로 시작하는 유연함도 있다.

Q 그런 작품을 직접 해볼 생각도 있나.

 

해보고 싶은데 이젠 내 상상력으로는 힘들지 않을까 싶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내가 70년대 세대라 오히려 데카당스한 경험을 해봤다는 거다. 80년대에도 나는 중심에 있지 않고 보조자 역할이었다. 자랑할 건 아니지만 나는 사회과학 서적을 거의 안 읽었고 해방신학이라든지 종교관계 서적들을 많이 읽었다. 내가 무식해선지 그쪽이 유연해서 좋았고 오래 간다.

 

Q 한국 영화의 부흥은 80년대 영화운동 하던 청년들이 대거 충무로로 투신한 결과이기도 하다. 누구도 그들에게 계속 운동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지 않지만 그들의 행태엔 분명 지나친 데가 있다. 자신의 경험을 스스로 모욕하는 사람들에 대해선.

 

아예 부정한다고 말하면 좋겠다. 부정하는지 안 하는지 말도 안하고 안면을 몰수하는 게 문제다. 영화운동 같이 하던 사람들이 충무로에 들어가서 나름대로 성공하는 걸 보면 한편으로는 박수치고 싶고 한편으로는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의문이 든다. 혼란스러운 건 전혀 다른 작품을 한다는 거다. 연장선상에 있다는 느낌, 고민하고 있다는 느낌을 조금만 받을 수 있다면 흔쾌하게 박수칠 텐데. 욕하고 싶진 않고 조금 갸우뚱하는데 아직 인간적인 유대는 남아 있다고 믿는다. 4월에 독립영화 회고전을 하는데 충무로에서 활동하는 옛 동료들하고 토론회를 하기로 했다. 그때 무슨 얘기가 나올지 궁금하긴 한데 얘기가 잘 이루어질지 모르겠다.

 

Q 아까 시민단체에 돈이 돈다고 했는데 뒤집어 말하면 그들이 제도권의 구미에 맞는 운동을 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런 방식의 운동이 각광을 받으면서 좀더 진보적인 원칙을 고수하는 운동은 부당하게 폄하되는 분위기가 있다. 독립영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가 거슬리는 건 누구든 유독 선생에 대해선 다들 칭송 일변도라는 점이다. 그러나 선생 한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그런 칭송은 전체 독립영화인들에 대한 경멸을 전제한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좀 꼬인 건가.

 

아니다. 나 역시 낯간지럽다. 그런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긴 커녕 차라리 너나 똑바로 해라 싶은 생각이 든다. 문제는 나한테 있는데 부닥치지 않는다는 거다. 뭔가 따끔한 게 있었다면 그런 얘기 못 할텐데 두리뭉실 관계를 유지하니까 그런 것 같다. 내 성격이 딱딱 끊지를 못한다. 나는 해도 남한테 강요하기 싫고, 넌 그렇게 가라 나는 나대로 간다라는 적당주의가 있다.

Q 하여튼 선생은 한국 독립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니 그런 뒤집힌 가치들에 한번은 정색을 하고 비판할 필요도 있지 않은가. 분투하는 후배들의 위엄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나는 지도자 품성이 아닌데 억지 춘향으로 일을 맡고 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할 자신이 있다. 결정적인 순간이 언제인지 판단하는 게 중요하다.

Q 세상이 달라졌다고들 한다.

 

그런 소릴 들으면 정말 화가 난다. 물론 각론으로 들어가면 좋아진 것도 있다. 독립영화도 이젠 검열 걱정 안 하니 좋고 도시빈민들도 임대아파트 생겼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나더러 행복해졌냐고 묻는다면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하겠다.

 

Q 뭐가 문젠가.

 

달라지지 말아야 하는 것들만 달라지고 달라져야 하는 것들은 안 달라진다. 옛날엔 힘이 들었지만 모이면 힘이 났는데 동지들 다 떠나고 관계가 엷어지고, 만나도 옛날에 우리가 잘못 생각했어 그때 웃겼어 그런 냉소만이 가득하다. 근본적으로는 아직 달라진 게 없는데 민주주의든 삶의 질이든 아직 과정 중에 있는데 포기해 버리면서 피상적인 변화만 가지고 세상이 달라졌다, 사는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 강변한다.

Q 절망적인가.

 

종말론적인 어두움을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희망을 믿는다. 내 안에도 우리 사회에도 희망이 있고 그걸 키우고 싶다. 키우는 방법은 결국 희망을 찾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자체가 희망인 사람들을 만나는 데서 출발한다. 내 주변에 누가 있는가 내가 어디에 있는가가 가장 중요하다. 내 경우, 산동네 사람들이 여전히 만나서 즐겁고 내게 힘을 주는 사람들이다.

 

Q 다큐멘터리 감독이라기보다는 빈민운동가라는 비판 아닌 비판을 받기도 하는데.

 

나는 빈민운동에서도 아웃사이더다. 빈민운동과 신자유주의 문제를 연결해야 한다는 소수의견을 내고 있다. 빈민운동이 사회운동에 복무하는 흐름이 대세이던 시절 나는 지역에 천착하고 삶에 비중을 두고 싶었다. 당시엔 노동운동이 너무 말이 많고 자기들이 주인공이라 생각해서 달갑지 않았다. 빈민운동은 자기 동네에서 하니 삶과 투쟁이 유리되지 않는 진짜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이젠 오히려 빈민운동이 노동운동과 연대하고 전체 운동의 맥락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Q 공동체운동이 대안으로 주장되기도 하는데.

 

공동체 운동은 지나치게 종교적이거나 지나치게 중산층적으로 갈 위험이 있다. 그리고 빈민운동처럼 분명한 공동체 운동은 없다. 이를테면 아파트공동체 운동 같은 중산층 운동에 빈민운동이 줄 건 있어도 받아올 건 아무 것도 없다. 노동운동은 계급도 같고 이젠 빈민운동도 계급 운동의 정체성을 강화할 때라고 본다. 결국 빈민운동은 노동운동과 함께 가야 한다.

Q 십수년 전 군대 말년휴가 길에 인사동에서 <상계동 올림픽>을 봤다. 이른바 변혁운동의 열기가 한껏 고조될 무렵이었고 관객의 질문에선 카메라가 멀다, 왜 카메라는 싸우지 않느냐는 식의 공격이 있었다.

 

기억한다. 그런 질문에 나는 엉뚱한 답변을 했고 그런데 부끄러운 걸 몰랐다. 왜 나를 여기에 불러서 자기들의 기준으로 재단하려 하나 하는 불쾌감도 있었고, 한편으론 그들에게 어떤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나저나 그 사람들 다 어디로 갔는지 아는가.

 

Q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도 하고 누구나 아는 일이기도 하다. 하여튼 그들은 그렇게 사라졌고 선생은 오늘 한국영화에서 가장 정치적인 지점에 서 있다. 나는 선생의 그런 지점이 선생보다 앞장 선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결과라 생각했는데 선생은 당시에 비해 좀더 분명한 정치 의식을 갖게 된 것 같다.

 

좀 나아졌다. 상계동 만들 땐 계급의식이 아닌 중산층적 영화인적 의식에 머물렀다. 그런 의식의 변화는 남들에겐 시류를 거스르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지만 나로선 너무나 당연하다. 오늘, 어느 시절보다 더 분명한 너무나 분명한 세계적 계급분화 현상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오죽하면 수십년 잠잠하던 미국 대학생들까지 신자유주의 반대를 말하겠는가.

 

Q 지난해 선생의 다큐멘터리 15주년 특별전을 한 걸로 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뭔가.

 

아무래도 <상계동 올림픽>. 철거민들과 살게 되고 그 작품을 만들게 된 건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엉뚱한 출세작이 되었고 결국 내 삶을 규정했으니 나로선 운명적인 작품인 셈이다.

Q 요즘도 테입이 팔린다던데.

 

철거민들과 3년 동안 같이 살면서 만들었다는 부가가치가 있는 것 같다. <상계동>은 걸레 같은 화질에 어줍잖은 나래이션에다 3년 동안 찍었는데 27분밖에 못 건진 그런 작품이다. 그때 다큐멘터리가 뭔지 알았다면 그렇게 만들지 않았겠지. 그러나 알았다면 아예 만들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Q <상계동>은 작품이라기보다 기록의 느낌이 강하다.

 

지난해 특별전(김동원 특별전) 때 상계동 시절 총무하던 분을 초청했다. 당시엔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상계동을 못 봤던 분이다. 현장은 영화보다 치열했다는 비판을 기대하고 초청했는데 내가 고생 했다는 얘기, 영화는 찍지 않고 돌 들고 같이 싸웠다는 얘기만 했다. 사실 <상계동>의 절반은 내가 찍은 게 아니다. 동네 청년들, 천도빈 회원들이 찍었다. 나는 못 찍더라도 같이 돌 던지고 싸우는 게 마음 편했고 지금도 그렇다.

Q 특별전 때 선생은 후배들에게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 평론가는 그 일을 “비판으로 선배에 대한 존경을 표시했다”고 적었던데.

 

그 지적들이 나름대로 정확했고 새로운 시도가 필요한 시점에서 후배들의 그런 비판은 나에게도 필요했다. 물론 내 작품을 독립영화의 표본으로 놓고 얘기하는 건 무리고 내 작품은 어떤 고리가 되기에 약하지만 후배들의 그런 비판을 나 역시 일종의 헌사로 받아들인다.

 

Q 새로운 시도란 무엇인가.

 

독립 다큐가 독립 다큐라는 이유만으로 옹호 받고 지지 받는 단계는 넘어설 때가 되었다. 밖에서 어렵다면 안에서라도 비판해야 할 시점이다. 두가지 변화가 필요하다. 하나는 운동으로서 다큐라고 했을 때 이젠 내부 갈등도 드러내고 그것을 이슈화 할 필요가 있다. 둘째는 개인을 다룬 작품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 내 가족 이야기, 연애 이야기 같은 개인사들 말이다. 물론 그 목적은 진보여야 한다.

 

Q 목적이라 했나.

 

다큐멘터리는 현실을 기록하는 예술이고 소재나 대상은 달라진다 해도 언제나 그 목적은 현실이 변화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목적은 진보다.

 

Q 선생의 가난한 카메라가 이길 것이다.

 

 

김동원

푸른영상 대표
한국독립영화협회 대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영화위원장

1955년생
서강대 신방과 대학원 졸업
1983-86 이장호, 정지영, 장선우 조감독
1988년 <상계동 올림픽>
제39회 베를린영화제 포럼 부문,
1991 야마가타국제기록영화제 초청 상영
1990년 <벼랑에 선 도시빈민>
1991년 <하느님 보시니 참 좋았다>
1991년 푸른영상 설립
1993년 <미디어 숲속의 사람들>
1994년 <행당동 사람들>
1995년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이다>
1997년 <명성, 그 6일의 기록>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 최우수독립영화상 수상,
제 48회 베를린영화제 포럼 부문 초청 상영
1999년 <또 하나의 세상>(행당동 사람들 2)

by 달팽이 | 2009/04/17 00:31 | 기억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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